뿌리

[스크랩] 우리 집안 딸들도 기개가 넘치는 것에도 다 내력이 있군요 ㅎㅎ

팔음산 2013. 2. 24. 08:44

오피니언
<김진우의 성씨이야기> 금강유역 토성(土姓)·입향성씨(入鄕性氏) 11) 여산 송씨(礪山宋氏) ⑦
데스크승인 [ 3면 ] 2013.01.11   김진우 | bluysky2002@hanmail.net
송서[(宋瑞, 1278~1353(충렬왕~공민왕)]는 입조(立朝)에 근엄하며 탁연(卓然)한 공훈을 세웠으나 쟁명공탈(爭名功奪)의 무리와는 판이해 왕실부익(王室扶翼)에만 갈충진성(碣忠盡誠)하여 국가존망과 생을 함께 하다가, 1353년(공민왕 2) 76세로 경저(京邸)에서 사망하자 정가(正嘉)의 시호가 내렸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선영의 동강(東崗)에 있어 38선 이북에 위치해 후손들이 송서의 아들 판사공(判事公) 송인번(宋仁蕃)과 손자 목사공(牧使公) 송전(宋琠)의 묘소가 있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화악리에 설단하여 제사지내고 있다.

배위 군부인(郡夫人:태조 5년(1396) 5월, 문무 정1품. 종1품의 처에게 준 작호) 안주강씨(安州康氏)는 봉훈대부(奉訓大夫)로 감문위상호군(監門衛上護軍:정3품)을 지낸 강적순(迪順)의 딸이며, 장남은 봉익대부(奉翊大夫:종2품 문관 하(下)의 품계)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왕이 타는 말(마필), 궁중의 가마 등을 관장한 관청의 벼슬)를 지낸 송인번(宋仁蕃), 차남은 증이조판서(贈吏曺判書;정2품 장관) 송윤번(宋允蕃), 3남은 전서(典書:정3품 장관)를 지낸 송의번(義蕃)등 3남 2녀를 두었다.

송질(宋軼, 1454~1520, 시호는 숙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가중(可仲)이며, 도정(都正) 송공손(宋恭孫)의 아들이다. 1477년(성종 8)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때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고,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 송질의 묘와 신도비는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선암리 산15-1에 있으며, 향토유적 제8호에 지정되었다. 비문은 1641년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성세창이 글을 짓고 김로가 글씨를 썼다. 묘소 부근에는 송질의 위패를 봉안한 사우 ‘숙문사’가 있는데,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맛배지붕 양식의 건물이다.

“송질 셋째딸 세계 유명 여류인사 속에 한국여성으론 유일하게 올라”

송질의 셋째딸은 남양홍씨(토홍)가문으로 시집을 가 홍씨가문 영화의 절정을 이루게 한 어머니이자 아내였다. 중종(中宗) 때 영의정에 오른 남양홍씨 문희공(文僖公) 홍언필(洪彦弼)과 그의 아들 홍섬(洪暹)의 대(代)이다. 홍섬(洪暹)은 선조때 영의정을 세 번 역임하며 명상(名相 )이자 청백리(淸白吏)의 칭송을 들었는데 부자가 정승을 지낸 드문 기록을 세웠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 여산(礪山) 송(宋)씨는 중종(中宗) 때 영의정을 지낸 송질의 셋째딸로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정승인 ‘세계사상 유일의 복많은 여성’이다.

당시에도 왕비와 대신의 부인 등 상류사회 부인들의 사교 모임이 있었는데, 왕비는 송부인이 나타나면 꼭 일어서서 마중하며 깍듯한 존경을 표했다 한다. 그 까닭을 묻자 왕비는 자신은 남편이 임금일 뿐이지만 송부인은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재상이니 어찌 내가 공경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고 했다. 송부인은 명문의 여인답게 예의범절에 밝고 부덕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여장부였다 한다.

그녀가 처녀시절 친정아버지 송질은 극성스런 부인의 성격에 골치를 앓던 나머지 딸들도 어머니를 닮으면 큰일이다 싶어 세 딸을 불러 놓고 한마당 연극을 했다고 한다. 딸들 앞에 약을 한 사발씩 내놓고 너희들이 어머니를 본받아 극성을 부리면 다음에 시집을 가더라도 송씨 가문에 누가 미칠 터이니 그럴 양이면 여기 이것이 독약이니 아예 마시고 죽어라고 했더니, 위로 두 언니는 절대로 어머니 같은 극성을 부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반면 유독 셋째 송부인만은 “사람이 세상에 나서 자기 본마음대로 살지못하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뭐가 다르겠냐”고 선뜻 약사발을 들어 들이켰다는 것. 그 약은 그러나 독약이 아니라 보약. 딸들의 기질을 시험하고 길을 들이려던 송질은 이 셋째 딸의 기개에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한다.

유감없이 한 세상을 살 그런 기질을 타고 낳던 듯 싶다. 그녀는 평생 세 번 평양(平壤)을 갔다. 처녀때 평안(平安)감사 아버지를 따라, 결혼한 뒤 평안감사 남편을 따라, 세 번째는 늙어서 평안감사 아들을 따라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 평양의 경치를 구경한 것은 늙어서 아들을 따라가서였다. 처녀 때와 젊은 부인이었을 때는 몸가짐을 조심하느라 집밖을 나가지 않았던 것. 할머니가 되어 세 번째 가서야 가마를 멈추게 하고 “이제는 평양 구경을 해도 욕되지 않을 것이다”며 산천경개를 구경했다.

평안감사 관사별당에는 그녀가 처녀 때 와서 심었던 복숭아와 앵도나무는 그때 고목이 되어 있었다. 송부인은 나무가 이렇게 늙었으니 나는 얼마나 늙었겠느냐고 인생무상을 탄식했는데 이 얘기를 전해들은 중종(中宗)은 이 당대 복덕귀(福德貴)부인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특별과거를 베풀고 글제로 ‘三至柳京歎櫻桃樹老(삼지유경탄앵도수로)’ ‘세번 평양에 가서 앵도나무의 늙음을 탄식하다’를 출제했다는 것이다. 남성 위주의 조선사회에서 여성이 존경과 대우를 받은 드문 한편의 가화(佳話)가 아닐 수 없다. 몇 해 전 미국에서 간행된 세계 유명 여류인사 속에 한국여성으론 유일하게 올랐다.

 

http://www.gg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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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세종도 못말린 ‘조선의 이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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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승인 2013.01.09  15:08:58 탁효정 |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부왕의 명으로 헤어졌던

첫여인 송씨와 영응대군

그 치명적 사랑이 깃든 절

부모의 반대로 첫사랑과 헤어지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지만, 떠나간 연인을 잊지 못해 결국에는 부인을 버리고 옛 연인과 다시 만난다. 드라마에 나와도 너~무 자주 나오는 첫사랑 신드롬. 웬만하면 TV를 꺼버리고 싶은 이 진부한 드라마 속의 부모가 세종이고,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주인공이 세종의 아들이라면, 이걸 막장드라마라고 해야 할까, 대하드라마라고 해야 할까.

세종의 여덟 번째 아들 영응대군은 두 번이나 이혼을 했다. 아버지의 등쌀에 밀려서였다. 영응대군은 1444년(세종 26) 여산송씨 가문의 규수와 혼인을 했지만, 5년 뒤 송씨 부인과 이혼을 했다. 그리고 곧바로 해주정씨 규수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실록에는 영응대군의 첫 부인 송씨에게 병이 있어 궁에서 내보냈다고 기록돼 있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역사학자는 거의 없다. 송씨는 환갑이 넘도록 살았고,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온갖 불사를 벌일 정도로 건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송씨는 왜 궁에서 쫓겨나야만 했을까. 이유는 송씨가 궁궐의 엄격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영응대군에 대한 세종의 애정이 지나치게 컸던 것도 적잖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영응대군은 세종이 가장 예뻐한 아들이었다. 영응대군은 세종이 38살, 소헌왕후가 40살에 낳은 막내아들이었다. 늘그막에 얻은 막둥이를 너무도 사랑한 세종은 왕실의 진귀한 보물을 모두 영응대군에게 주었고, 영응대군의 집을 너무 화려하게 지어준 나머지 조정에서 논란이 불거질 정도였다. 세종이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곳도 영응대군의 집이었다.

그런데 세종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아들에 비해 며느리가 영 눈에 차질 않았다. 아마 며느리가 발랄한 정도를 넘어서, 아들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드세었던 것이 세종의 눈에는 매우 거슬렸던 것으로 보인다. 막내며느리가 탐탁지 않았던 세종은 아들을 강제로 이혼시켰고, 해주정씨 가문의 규수를 골라 서둘러 재혼을 시켰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송씨를 잊지 못한 영응대군이 아버지 몰래 전 부인을 만나러 다닌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딸을 둘이나 낳았다.

영응대군이 송씨와 결혼한 것은 11살, 그들이 이혼한 것은 막 16살이 되었을 때였다. 차마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해 헤어지기는 했지만, 영응대군에게 있어서 송씨는 아련한 첫사랑이었고, 자신과 함께 성장한 누이였으며,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 소헌왕후를 대신한 존재이기도 했다. 또한 송씨는 두 번째 부인 정씨와 달리 개성이 뚜렷하고 톡톡 튀는 매력이 넘치는 여자였다.

최근 해주정씨 집안의 문서를 발굴한 안승준 장서각 연구원에 따르면, 송씨 부인은 자유분방한 고려적 기질의 여자였고, 정씨 부인은 점잖고 현숙한 조선 여자였다. 고려의 구(舊)귀족 집안에서 자란 송씨가 매우 쾌활하고 의사표현이 분명한 여자였던 반면, 신진사대부 집안에서 자란 정씨는 유교식 가정교육을 받은 기품있는 여자였다는 것이다.

영응대군은 단종 1년(1453) 정씨 부인에게 이혼을 통보하고 송씨 부인을 다시 맞이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춘성부부인 정씨에게 봉작한 사령장를 거두고, 송씨 부인을 대방부부인으로 봉작했다.

두 번 이혼한 경력은 영응대군이 죽을 때까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영응대군 졸기에는 “부왕의 명령 때문에 송씨를 버렸고, 정씨는 버릴 만한 죄가 없는데도 사랑과 미움으로 내쫓고 받아들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삼았다”고 기록돼 있다.

송씨의 자유분방한 성격 또한 말 많은 사관(史官)들의 뒷담화 소재가 되었다. 송씨 부인은 영응대군이 죽은 후 양주의 범굴사를 원당으로 삼았고,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니며 불공을 올렸다. 또한 왕실과 사족 집안의 여성들을 불러 모아 대대적인 불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 같은 불교행사들은 실록에 기록될 때 ‘문란한 여성의 은밀한 사생활’로 둔갑했다. 실록에는 등장하는 왕실여인들의 스캔들 중에서도 송씨와 관련된 스캔들이 가장 많은데, 그 내용은 대부분 하드코어 수준이었다. 이는 왕실의 여성불자들 중에서도 가장 통제 불가능한 인물이 송씨였음을 알려준다.

이 같은 송씨의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성격이 시아버지 세종의 눈에는 매우 버르장머리 없고 제멋대로처럼 비쳐졌을 것이다. 하지만 세종의 막내아들에게 송씨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 그 자체였다.

[불교신문 2879호/ 1월12일자] 

출처 : 여산송씨종친회
글쓴이 : 송재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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