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중의충신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충신중의 충신(忠臣) 송상현(宋象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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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상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몸 바쳐 싸우다 순국하신 충신들이 많고도 많지만 조선의 역사 5백년을 통하여 가장 큰 감동을 준 충신의 최후를 길이 후손에게 남겨주신 분은 단연코 동래부사 송상현이라고 생각한다.
충신의 죽음을 놓고 멋지다 예술적이다 라고 표현한다면 참으로 불경스러운 표현이 아닐까 죄송스럽기도 하지만 송상현의 순국 장면은 그야말로 그 어떤 충신의 순국에 비해도 가히 예술작품이상을 능가할 만큼 쇼킹하고 드라마틱한 역사였다. 그러기에 그분이 가신지 423주년이 지나도록 우리는 생생한 장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고 온 국민의 가슴속에는 충절의 정신이 영원히 살아있는 기억으로 미래의 후손들에게도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송상현(1551~1592)은 내직에 있다가 지방관인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4월에 임진왜란을 맞게 된다. 당시의 부산은 부산진, 다대진, 부산포라는 포구들이 있었고 이 모두를 관할하는 동래부가 현재의 부산광역시 전체를 아우르는 지역이 동래부 산하였다. 동래부는 여타 지역의 부사(府使)보다도 한 급 높은 정3품이상의 당상관이 부임하는 요지였다. 송부사는 선비정신이 투철한 유학자로서 내직에 있을 때 바른말을 잘하는 직언으로 상급자들에게 부담을 느끼게 할 정도로 강직한 선비였으며 통정대부로 승진하였으나 지방관으로 밀려 동래부사로 부임하게 된다. 현재 부전역 일대에 송상현광장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지역이 옛날에는 언덕이었고 이곳을 모너머 고개라고 하였으며, 고개를 기준으로 부산지역의 안과 밖이 구분지어 졌다.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592년 4월13일 부산진과 부산포를 쉽게 점령한 왜군들은 4월 14일 동래성을 에워싸고 일촉즉발의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성에서 적을 향해 전황을 살피는 송부사에게 왜놈들은 목판에 “戰則戰矣,不戰則假我道”라고 써서 보여주었다. 이것을 받아본 송부사는 “戰死易 假道難” 6글자를 목판에 써서 적진으로 던지고 성민들과 일치단결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은 다음날(4월15일) 오시경에 함락되고 만다.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못하겠으면 길을 비켜라.” 에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 라고 답한 것이다. 전세가 매우 불리함을 간파하고 조복(朝服)을 가져오게하여 갑옷위에 입고 임금이 계시는 북향에 하직 인사 하고 부모님께 글을 올린다. 이 글을 혈선발(血扇발)이라고 하는데 “君臣義重 父子恩輕”이라고 부채에다 피로 써서 남긴 글이다. 즉 군신의 의는 무겁고, 부자간의 은혜는 가볍다.는 말인데 나라와 임금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일이 부자간의 은혜보다는 먼저라는 애국충정의 글을 남기신 것이다.
송상현의 고별시
孤城月暈 (고성월운) |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포위되었는데 |
列鎭高枕 (열진고침) |
이웃한 여러 진에는 도와줄 기척도 없구나. |
君臣義重 (군신의중) |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무거운 것이오매 |
父子恩輕 (부자은경) |
아비와 자식의 은정을 가벼이 하오리다. |
송상현의 생애(生涯)와 약력(略歷)
공께서는 여산송씨 15세손이며 평강,용안 현감을 지내신 송복흥(宋復興)의 아들로 전북 정읍시에서 태어나(선친들의 고향일뿐 본인은 서울태생이란 설도 있으나 확실한 출생지만은 불분명) 10세에 경사에 통달 15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여 김장생(金長生)과 우의를 맺었고 20세에 진사가 되었으며 26세에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시어 승문원 정자에 보임 되었으며, 승정원 주서, 경성판관, 1583년 사헌부지평으로 들어와 호조, 예조, 공조의 정랑, 공조 좌랑과 군자감의 정(正)을 지냈다.
1584년 종계변무사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시 지평이 되었다가 은계도찰방으로 좌천 후 다시 지평으로 다시 배천군수로 나갔다가 3년만에 전직되어 집의, 사간, 사재감, 군자감의 정(正)이 되었다.
1591년 집의로서 통정대부에 승진되고 동래부사에 임명되었다. 왜구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방비를 굳게 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4월13일 고니시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왜군에게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이어 동래에 쳐들어온 왜병은 동래성까지 점령 포로로 잡아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끝내 항복하지 않고 왜장에게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고 한다.
“남의 땅을 침범하여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앞으로 천주(天誅)를 면하지 못하리라. 내가 너희들에게 지지않을 것이니 네 어찌 이 같이 무도방자하단 말이냐?” 하고 안색하나 변하지 않자 왜놈들은 현장에서 처참하게 살해하였다. 공의 충절에 감복한 일본장수 소 요시토시 등이 동문밖에 장사를 지내 주었으며, 3년 후 가족들이 사는 청주로 이장하여 현재는 청주시 흥덕구 충렬사에 묘와 사당이 모셔져 있다.
사후(死後)의 보은사업(報恩事業) 충렬사(忠烈祠)
임진왜란은 일본(日本)의 전국시대를 무력(武力)으로 통일(統一)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정권의 안정과 영토욕(領土慾)을 채우기 위하여 일으킨 침략전쟁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한 정보가 어두워 이들의 침략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터에 조총(鳥銃)이라는 새로운 무기로 무장하고 몰려오는 왜적을 막아내기에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선열들은 의연한 기개로 적과 싸우다 최후를 맞았다.
충렬사는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순절하신 부산지방 순국선열의 영령(英靈)들을 모신 사당(祠堂)으로 선열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한 산 교육장이자 호국충절의 요람지이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을 봉사하기 위하여 동래읍성남문 안에 송공사(宋公祠)를 건립하고 위패를 모셔 매년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이 오늘날 충렬사의 시작이었다.
현재의 충렬사는 선조38년(1605년)에 동래부사 윤훤(尹暄)에 의하여 동래읍성 남문안에 충렬공 송상현을 모신 송공사(宋公祠)가 세워졌고 매년 제사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인조2년(1624년)에 선위사(宣慰使) 이민구(李敏求)의 건의로 사액(賜額)을 받고 부산진성에서 순절한 충장공 정발(鄭撥)을 모시게 되었다.
그 후 효종3년(1652년)에는 충렬사를 지금의 자리(安樂洞)로 옮기고 선열의 충절과 학행(學行)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강당(講堂)과 동서재(東西齋)를 지어 안락서원(安樂書院)이라 하고 사우(祠宇)와 서원(書院)으로서의 기능을 갖추었다.
숙종35년(1709년)에는 충렬공과 충장공이 순절할 때 함께 전사한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 유생 문덕겸(文德謙), 양조한(梁潮漢), 비장 송봉수(宋鳳壽), 향리 송백(宋伯), 부민 김상(金祥), 등의 위패(位牌)를 모신 별사(別祠)를 옛 송공사 터에 건립하였다.
영조12년(1736년) 별사에 모셨던 분을 충렬사에 합향하였으며 영조48년(1772년) 다대첨사(多大僉使) 윤흥신(尹興信) 공을 추배하고 임란 때 송상현공과 정발 장군을 따라 순절한 김섬(金蟾)과 애향(愛香)을 위해 충렬사 동문밖에 사당을 세웠다.
충렬사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와 보수를 하여 현재 약 9만5천㎡(2만8천7백평)의 경역에 본전 외 17동의 건물이 있으며 부산지방에서 순절한 93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5월 25일 온 시민의 정성으로 제향(祭享)을 올린다.
새롭게 태어난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에 가서 동래부사 송상현에 대한 역사를 만나고자 하겠다면 3가지로 구분하여 개념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충렬사가 있는 충렬사역과 두 번째 송공단이 가까이 있는 수안역 그리고 마지막이 남쪽으로 좀 내려와서 부전역에 송상현광장이 있다.
충렬사가 있는 동래구 충렬사역 관내에 있는 충렬사는 1610(광해2)년 처음으로 창건하였던 것을 몇 차례 중수를 거치다가 박정희 정권 때 현재의 위치로 이전확장 중건하면서 대대적으로 성역화 하였다. 당시에 순국하신 송상현을 비롯한 선열들 93위를 합사하여 위패를 모셔놓고 해마다 5월 25일에 관 주도의 제향을 올린다. (박대통령의 지시로 새단장을 한 충렬사는 대통령이 초헌관을 맡아 기념제향을 5월25일(음력4월15일)에 올리게 되는데 이때 부터 양력 5월25일로 고정시키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함.)
두 번째 송공단은 현재는 바로 앞에 상설 동래시장이 있으나 당시에 동래부 동헌이 있었던 자리에 송상현의 비가 세워져있고 재단법인 동래기영회라는 친목단체(1846년 부터)에서 매년 (음력4월15일) 제향을 봉행한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 수안역에는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이라는 지하철박물관이 만들어져 있어 당시의 동래전투 참상을 재현해 놓은 듯 볼거리도 잘 준비되어 있다.
세 번째 부전역 구내에 있는 송상현광장은 광장 북쪽에 동상이 서있고 지하철과 버스정류장, 잔디광장, 분수대, 문화마당 등 시민의 휴식공간을 겸한 만인의 광장을 겸하고 있으며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고 서울광화문광장 두 배의 규모라고 한다.
공께서는 이제 영원히 살아계신다. 현재 부산의 랜드마크로 우리 곁에 오셔서 모너머 고개에 “송상현광장”으로 환생하신 것이다. 충렬공 송상현 선조는 우리 모두와 함께 살아가시게 되었다. 지금은 고개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평지지만 과거에는 이곳을 경계로 부산의 안과 밖이 나뉘었다. 이곳은 부산의 다양한 정체성이 나뉘는 경계지점이자 다시 하나로 모여드는 중심이었던 것이다.
1978년 송상현공의 동상을 이 자리에 모신 것도 이러한 역사성을 감안한 것이었다. 산업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이곳은 차량통행을 위한 도로로 바뀌었다. 그러나 부산 시민들의 열망은 자동차를 위한 도로가 아니라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거듭 나기를 열망하여 시민의 열망을 수렴한 부산시가 2010년 8월 이 땅을 광장으로 조성키로 결정하고 명칭과 설계를 공모하여 마침내 2014년 6월 12일 개장식을 갖게 되었다.
송상현광장은 이 땅의 역사를 길이 후손에게 알려 더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 공간으로 탄생시키고자 조성하였으며 광장조성 내용을 보면
송상현공과 모너머 고개에 얽힌 역사성을 체험하고 기념하는 역사마당, 시민들의 다이내믹한 활동공간을 담을 수 있는 부산마당, 시민들이 풍요로운 문화를 즐기며 삶의 품격을 누릴 수 있는 문화마당으로 조성되어있다.
이 광장은 완성형 광장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진행형광장이며 광장의 주인은 오로지 시민이고 시민적 염원에서 시작되어 시민의 희망을 담을 수 있는 광장으로 탄생되었으므로 부산시민들이 주인이 되어 송상현 광장을 미래형 광장으로 가꾸어가기를 희망한다. 라고 안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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