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만의 해후(邂逅) |
류용환 대전선사박물관장 |
지난해 11월 13일 대전 중구 목달동 송절마을 뒷산을 오르는 연로한 일행의 두 손을 산 중턱 묘소에서 기다리던 동년배들이 황급히 내려와 덥석 부여잡는 일이 있었다. 서로가 초면인 이들은 멀리 전북 부안에서 올라온 여산송씨와 대전의 고성남씨로, 400여 년 만에 이루어진 두 집안의 해후였다. 이보다 앞선 2004년 봄 보문산 남쪽 기슭인 송절마을 뒷산에서 조선시대 미라가 발견되었다. 미라 주인공은 조선 세종 때 인물로 어모장군이란 벼슬을 지낸 여산송씨 송효상과 그의 후손들이다. 이날은 송효상에 대한 시제일로 제사를 주관한 측은 대전의 고성남씨였다. 즉 여산송씨 노인들이 타 성씨에 의해 치러지는 그들 조상의 시제에 참여하기 위해 부안에서 온 것이다. 사연은 송효상과 함께 미라로 발견된 증손 대에 이르러 아들을 두지 못해 손이 끊어진 탓이었다. 그러나 송희최의 셋째 사위로 남찬이란 분이 있어 이로부터 외손, 즉 고성남씨에 의해 보문산 송절마을에 모셔진 여산송씨 제사가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리고 부안의 여산송씨들은 송효상 사촌의 후손들로 그동안 방계 조상의 묘소를 실전한 것으로 알았으며, 이 때문에 족보에도 그 위치가 누락되었었다. 한편 미라 발견 당시 함께 나온 150여 점의 희귀한 조선 전기 출토복식을 일반에 공개하기 위한 전시회가 마련되었다. 전시기간에 송효상 관련 후손을 수소문한 결과 부안의 여산송씨에게 연락이 닿았고, 10개월 후 마침내 양 가문의 만남이 실로 400여 년 만에 이루어졌다. 이처럼 외손이 외가의 제사를 받드는 외손봉사(外孫奉祀)는 조선 중기까지 보편적 관행이었다. 외가 조상에 대한 제사를 수백 년간 이어온 재지사족(在地士族)이었던 고성남씨의 선행 또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닌가? 해마다 음력 10월이면 어느 문중묘역이 위치한 동구 이사동 사라니 마을의 야산은 때 이른 눈이 내린 듯하다. 연일 계속되는 시제에 쓰일 흰 차일 때문에 펼쳐진 장관인 것이다. 지난주 민족 최대 명절 설이 지나갔다. 세상이 아무리 바쁘고 각박하더라도 설만큼은 고향을 찾고 조상을 기리는 전통을 이어온다. 우리 민족만큼 조상을 기리는 효문화가 발달한 민족은 없다. 물질만능을 추구하는 세태 탓인지 갈수록 인성이 메말라 가는 현대사회에서 효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마침 대전시는 중구의 뿌리공원과 족보박물관, 효문화 축제 활성화를 위한 방안으로 효문화센터 건립과 효문화진흥원 유치를 추진하여 효 테마파크 설립방안을 마련 중에 있다. 계획대로 된다면 세계에 내세울 효문화 성지로 자리매김하여 과거 선비문화 유교문화의 본고장이었던 대전·충청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출처 : 여산송씨종친회
글쓴이 : 송재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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