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왕의 명으로 헤어졌던
첫여인 송씨와 영응대군
그 치명적 사랑이 깃든 절
부모의 반대로 첫사랑과 헤어지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지만, 떠나간 연인을 잊지 못해 결국에는 부인을 버리고 옛 연인과 다시 만난다. 드라마에 나와도 너~무 자주 나오는 첫사랑 신드롬. 웬만하면 TV를 꺼버리고 싶은 이 진부한 드라마 속의 부모가 세종이고,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주인공이 세종의 아들이라면, 이걸 막장드라마라고 해야 할까, 대하드라마라고 해야 할까.
세종의 여덟 번째 아들 영응대군은 두 번이나 이혼을 했다. 아버지의 등쌀에 밀려서였다. 영응대군은 1444년(세종 26) 여산송씨 가문의 규수와 혼인을 했지만, 5년 뒤 송씨 부인과 이혼을 했다. 그리고 곧바로 해주정씨 규수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실록에는 영응대군의 첫 부인 송씨에게 병이 있어 궁에서 내보냈다고 기록돼 있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역사학자는 거의 없다. 송씨는 환갑이 넘도록 살았고,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온갖 불사를 벌일 정도로 건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송씨는 왜 궁에서 쫓겨나야만 했을까. 이유는 송씨가 궁궐의 엄격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영응대군에 대한 세종의 애정이 지나치게 컸던 것도 적잖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영응대군은 세종이 가장 예뻐한 아들이었다. 영응대군은 세종이 38살, 소헌왕후가 40살에 낳은 막내아들이었다. 늘그막에 얻은 막둥이를 너무도 사랑한 세종은 왕실의 진귀한 보물을 모두 영응대군에게 주었고, 영응대군의 집을 너무 화려하게 지어준 나머지 조정에서 논란이 불거질 정도였다. 세종이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곳도 영응대군의 집이었다.
그런데 세종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아들에 비해 며느리가 영 눈에 차질 않았다. 아마 며느리가 발랄한 정도를 넘어서, 아들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드세었던 것이 세종의 눈에는 매우 거슬렸던 것으로 보인다. 막내며느리가 탐탁지 않았던 세종은 아들을 강제로 이혼시켰고, 해주정씨 가문의 규수를 골라 서둘러 재혼을 시켰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송씨를 잊지 못한 영응대군이 아버지 몰래 전 부인을 만나러 다닌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딸을 둘이나 낳았다.
영응대군이 송씨와 결혼한 것은 11살, 그들이 이혼한 것은 막 16살이 되었을 때였다. 차마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해 헤어지기는 했지만, 영응대군에게 있어서 송씨는 아련한 첫사랑이었고, 자신과 함께 성장한 누이였으며,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 소헌왕후를 대신한 존재이기도 했다. 또한 송씨는 두 번째 부인 정씨와 달리 개성이 뚜렷하고 톡톡 튀는 매력이 넘치는 여자였다.
최근 해주정씨 집안의 문서를 발굴한 안승준 장서각 연구원에 따르면, 송씨 부인은 자유분방한 고려적 기질의 여자였고, 정씨 부인은 점잖고 현숙한 조선 여자였다. 고려의 구(舊)귀족 집안에서 자란 송씨가 매우 쾌활하고 의사표현이 분명한 여자였던 반면, 신진사대부 집안에서 자란 정씨는 유교식 가정교육을 받은 기품있는 여자였다는 것이다.
영응대군은 단종 1년(1453) 정씨 부인에게 이혼을 통보하고 송씨 부인을 다시 맞이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춘성부부인 정씨에게 봉작한 사령장를 거두고, 송씨 부인을 대방부부인으로 봉작했다.
두 번 이혼한 경력은 영응대군이 죽을 때까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영응대군 졸기에는 “부왕의 명령 때문에 송씨를 버렸고, 정씨는 버릴 만한 죄가 없는데도 사랑과 미움으로 내쫓고 받아들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삼았다”고 기록돼 있다.
송씨의 자유분방한 성격 또한 말 많은 사관(史官)들의 뒷담화 소재가 되었다. 송씨 부인은 영응대군이 죽은 후 양주의 범굴사를 원당으로 삼았고,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니며 불공을 올렸다. 또한 왕실과 사족 집안의 여성들을 불러 모아 대대적인 불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 같은 불교행사들은 실록에 기록될 때 ‘문란한 여성의 은밀한 사생활’로 둔갑했다. 실록에는 등장하는 왕실여인들의 스캔들 중에서도 송씨와 관련된 스캔들이 가장 많은데, 그 내용은 대부분 하드코어 수준이었다. 이는 왕실의 여성불자들 중에서도 가장 통제 불가능한 인물이 송씨였음을 알려준다.
이 같은 송씨의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성격이 시아버지 세종의 눈에는 매우 버르장머리 없고 제멋대로처럼 비쳐졌을 것이다. 하지만 세종의 막내아들에게 송씨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 그 자체였다.
[불교신문 2879호/ 1월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