礪山宋氏 正嘉公派 宗歌(여산송씨 정가공파 종가)
1. 천호산(天壺山)의 정기(精氣) 받아 태어난 우리는
고려우정승(高麗右政丞) 충신(忠臣)의
자랑스런 후손이라네
덕(德)과 선(善)을 쌓아가는 우리는
여산송씨 정가공파
(후렴) 하나되어 나아가자 정가공파
긍지와 자부심으로 힘을 모아 지켜가세
우리는 여산송씨 정가공파
2, 조상님의 가르침을 후세에 알리고
여산 정가공(礪山正嘉公) 단결함을
이 세계에 널리 알리세
동방의 예의지국(禮儀之國)
아름다운 금수강산 지켜내어
후손에게 물려주는
우리는 여산송씨 정가공파
(후렴) 하나되어 나아가자 정가공파
긍지와 자부심으로 힘을 모아 지켜가세
우리는 여산송씨 정가공파.
礪山 宋氏 正嘉公派 宗訓 / ♡족보/문중 자료♡
♣ ㅡ. 千 波 一 本(천 파 일 본)
천갈래 갈렸어도 근원은 하나이며
♣ 二. 萬 枝 同 根(만 기 동 근)
만가지 뻗었어도 뿌리는 하나이라
♣ 三. 忠 義 之 家(충 의 지 가)
충성과 효도로서 이름난 집안이요
♣ 四. 道 義 之 門(도 의 지 문)
도덕과 의리로서 번성한 문중이라
♣ 五. 世 守 敦 睦(세 수 돈 목)
대대로 돈목스런 친목을 지켜오며
♣ 六. 永 垂 後 昆(영 수 후 곤)
영원히 후손에게 전하여 기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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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족보 간행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에 보면, 1562년(명종 17)의 《문화유보(文化柳譜)》가 최초라 하였으나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문헌적으로 믿을 수 있는 최초의 것은 1476년(성종 7) 간행된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족보 《성화보(成化譜)》로서 《문화유보》보다 80년 앞서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고려 때에도 양반 귀족은 그 씨족계보(氏族系譜)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하였고, 관제(官制)로서도 종부시(宗簿寺)에서 족속보첩(族屬譜牒)을 관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거가(巨家) 귀족(貴族) 사이에는 보계를 기록 보존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족보를 가첩이라 함은 동족 전부에 걸친 것이 아니라 자기 일가의 직계에 한하여 발췌초록(拔萃抄錄)한 세계표(世系表)를 가리키며, 가승이라 함은 계도(系圖) 외에 선조의 전설 ·사적에 관한 기록을 수록한 것을 가리킨다.
일명 보첩(譜牒) ·세보(世譜) ·세계(世系) ·가승(家乘) ·가첩(家牒) ·가보(家譜) ·성보(姓譜)라고도 한다. 국가의 사승(史乘)과 같은 것으로, 조상을 존경하고 종족의 단결을 뜻하며, 후손으로 하여금 촌수의 멀고 가까움에 관계치 않고 화목의 풍을 이루게 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 족보는 존비(尊卑) ·항렬(行列) ·적서(嫡庶)의 구별을 명백히 하고 있다. 본래 족보는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후한(後漢) 이후 중앙 또는 지방에 대대로 고관을 배출하는 우족(右族) ·관족(冠族)이 성립됨에 따라 문벌과 가풍을 존중하는 사상이 높아져 육조(六朝) 시대에 이르러 족보의 작성 및 보학(譜學)이 발달하였다
일반적인 족보는 이른바 종보(宗譜)에 해당하는 것이며, 여기에서 분파된 일단(一團)의 세계(世系)에 대해서는 이를 지보(支譜) ·파보(派譜)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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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譜(족보)
- 관향(貫鄕)을 단위로 같은 씨족의 세계를 수록한 보첩으로, 한 가문의 역사를 표시하고 가계의 연속을 나타내는 보책이다
世譜(세보)
- 두개 파(派) 이상의 종파(宗派)가 서로 합해서 편찬한 보첩(譜牒)을 말한다.
家譜(가보)와 가첩(家牒)
- 편찬된 형태와 내용의 상관없이 동족 전부의 것이 아니라 자기 일가 직계에 한하여 발췌한 世系表(세계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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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송씨 정가공파 가보 및 세보 등 ↓↓↓↓
↑↑↑ 여산송씨 가보(정가공파)와 세보의 보존 모습
↑↑↑ 조부께서 장롱 혹은 땅속에 숨겨 놓았다가 1919. 3.1 대한독립만세 있은 후 전국 퍼졌을 때
동년 3/13일 부산 동래 장날 부산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등 수천명의 민중봉기, 왜놈에 항거할
↑↑↑때 부산동래시장 장터에서 사용하셨던 바로 그 태극기라고 부친이 말씀하셨고, 뚜버기 어릴적
광복절등 국경일에 우리집 대문 옆 국기꽂이에 꽂아 놓은 것을 어릴적 본 기억이 있는 바로
↑↑↑그 국기다. 언제부터(1950년대말?)인가 사용치 않고, 일부 족보 및 가첩 등과 함께 집에 보관
중이다. 乾건3,坤곤6,坎감5,離리4(비록 감5 리4 가 바뀌어 그려 졌지만 우리 집안의 보물이다)
↑↑↑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한 박영효(1861~1939)는 1882년 우리나라 최초로 태극기를
↑↑↑ 공식적으로 제작하여 게양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나, 태극기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 고종과 김홍집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1882~1900년도초에 그려진 태극기의
↑↑↑ 건곤감리의 위치는 현재와 다르게 그려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에 그려진 태극기의
↑↑↑ 감과 리의 위치는 위 모양과 같다. (참고로 검곤감리의 뜻은 하늘,땅,물(달),불(해)을 의미한다)
↑↑↑ 여산송씨 정가공파 가보 및 세보의 일부...
원본은 우리나라에 몇 권 없는 귀한 것으로 압니다.
↑↑↑ 여산 송씨(정가공파) 족보(가보 및 세보 등) : 자택 보존 중인 원본
↑↑↑ 만력 46년(1618년)에 선조께서 받으신 교지 일부...
교지란?
조선시대 왕이 신하에게 관직(官職)·관작(官爵)·자격(資格)·시호(諡號)·토지·노비 등을 내려주는 명령서.
태조에서 태종까지는 관교(官敎)·왕지(王旨)라고 했다가 세종 때부터 교지라고 불렀다. 4품 이상 문·무관의 고신(告身), 홍패(紅牌)·백패(白牌)의 수여, 추증(追贈), 노비와 토지의 사패(賜牌), 향리면역(鄕吏免役)의 사패 등의 경우에 교지를 내렸다. 교지에는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어보(御寶)가 사용되었다.
통정대부 [通政大夫] 란? 요약
조선시대의 관계(官階).
정3품의 상계(上階)이다. 1865년(고종 2)부터는 문관뿐만 아니라 종친(宗親)·의빈(儀賓)의 품계로도 함께 사용하였다.
통정대부는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근무일수에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가자(加資) 또는 가계(加階)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봉조하(奉朝賀)가 되어 녹봉(祿俸)을 받는 등의 특권을 누렸다.
정삼품 [正三品] 요약 고려·조선 시대 문·무관의 품계.
조선시대 정3품관은 상·하, 동반(東班:文官)·서반(西班:武官)·종친·의빈(儀賓)으로 구별되었는데 1865년(고종 2)부터 모두 동반의 명칭으로 통일하였다. 정3품 상(上)의 관계부터 당상관(堂上官)이 되므로 정3품 벼슬은 상의 당상관에 오르느냐, 하의 당하관에 머무느냐에 따라 신분상 큰 차이가 생겨 벼슬길의 큰 갈림길이 되었다. 정3품 하에서 정3품 상의 당상관이 되면 흑각(黑角)을 쓰던 망건의 관자(貫子)를 옥으로 바꾸어 영귀(榮貴)의 표상으로 삼고, 공·사간에 영감(令監)이란 경칭으로 불리었다.
통정대부(通政大夫)는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고위직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1급 관리관 쯤 될 듯 싶네요.
↑↑↑순치 9년(1652년) 한성부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선조(宋義修:송의수) 의 처에게 내리는 교지...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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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와 代는 기준이며 똑 같은 뜻이다.
世와 代는 나를 포함하고
代祖 世祖는 나를 빼고 치고,
世孫 代孫은 上代기준을 제외하고 친다.
孫을 붙이면 上代를 제외하며 祖를 붙이면 下代를 제외한다.
世孫/代孫, 代祖/世祖는 관계계촌이고
아들 손자 부 조부 증조부는 호칭이다.
世와 代 공식적인 기준표
世=代=기준 시작 祖를 포함하여 나까지=족보대로 한다.
世孫=代孫=기준인 上代祖를 제외하고 後孫만 헤아린다.
代祖=世祖=기준인 下代를 제외하고 先祖만 헤아린다.
(발췌) 驪州李氏 사이버재실 재실장 李星衡
세(世)와 대(代)
世와 代는 족보에 始祖를 몇 世 와 몇 代로 지정 했는가에 정해진다.
族譜에 지정 한대로 하면 된다.
礪山宋氏 世譜는 世를 기준으로 시조어른을 1世로 시작하였기에 世를 사용하여야 하며
代를 쓸 시에 始祖는 1代이다.
世와 代는 기준이고 기준 世, 代 만 쓴다.
꼭 世孫, 代孫, 世祖, 代祖 나와의 관계계촌을 밝히려
기준 世, 代에 헤아리는 첫 번째 기준은 제외하고
祖, 孫,을 붙혀 世孫, 代孫, 世祖, 代祖로 표기한다.
즉 世와 代에 1代 빼고, 世孫 代孫 世祖 代祖 칭한다.
1)국역연수원 교수 成百曉선생 글에서 代와 世는 똑같은 뜻으로 始祖를 1世로 하였다, 그리하여 만일 高祖로부터 자신까지 세어보면 5世가 되는데, 실제로는 고조가 4代祖가 된다. 즉 시조로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지 26世라면 시조는 당연히 25代祖가 되고, 자신은 25代孫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世와 代가 달라서가 아니요, 世 뒤에 祖나 孫을 붙였기 때문에 한 代가 줄었음을 알아야 한다.
2)한학박사이며 大한학자인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于溪 李炳赫박사께서도 世와 代는 같다고 하며, 27世(代)를 예, 26世孫(代孫)이고 기준이 된 先祖는 孫에 포함하지 않는다, 26代祖하면 자신이 기준이며 자신은 祖가 아니기에 기준인 자신을 빼야한다. 즉 世와 代는 같은 것이고
世孫, 代孫, 代祖 이럴 때는 조(祖)와 孫이 붙으면 기준이 되는 世(代)를 포함시키지 말아야한다.
즉 世(代) 를 뺀 代數 世數를 쓴다.
나의 뿌리를 알아보자
여산송씨 정가공파 宗訓 宗旗 宗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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